<민·관·농 협업 우수사례>여주 고구마로 술을 빚다
전통주는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왔지만,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낯설다. 고구마 증류식 소주를 개발하고 잊혀 가던 과하주를 복원하며 우리 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술아원 강진희 대표. 지난 2021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됐던 곳이다.
쌀이 좋은 곳, 그래서 여주였다
양조장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술의 기본은 쌀이었다. 술을 빚으려면 당연히 좋은 쌀이 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경기도 여주였다. 전국 최고의 쌀 산지라는 명성과 함께 서울 접근성도 큰 장점이었다. 처음 양조장을 세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주변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맨땅이었어요.”
설계부터 하나씩 만들어가며 지금의 술아원을 완성했다. 지금은 여행객들이 잠시 들러 전통주를 구입하는 명소가 됐고, 여주를 대표하는 양조장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주에서 술을 만드는 데 장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주 쌀은 품질이 뛰어난 만큼 가격도 높았다.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원료비 부담이 훨씬 컸다. 그럼에도 그는 품질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원료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고구마 소주와의 운명적인 만남
강 대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주의 또 다른 특산물인 고구마였다.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보니까 여주가 고구마 산지였습니다. 마침 저도 원래 고구마 소주를 좋아했어요.”
당시 국내에는 상품화된 고구마 증류식 소주가 없었다. 일본에는 다양한 고구마 소주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은 분야였다. ‘왜 우리나라에는 없을까.’ 호기심은 연구로 이어졌다. 고문헌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 감자와 고구마를 이용해 술을 빚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필 시리즈의 출발이었다.
술보다 먼저 생각한 것은 농가였다
백화점과 대형 유통업체는 일정한 크기의 고구마만 상품으로 취급한다. 조금 크거나, 작으면 맛과 품질이 좋아도 제값을 받기 어려웠다.
“고구마 규격만으로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술을 만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규격에서 벗어난 고구마를 원료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고구마를 원료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판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연간 30톤 이상의 고구마가 들어온다. 고구마 증류주는 그렇게 지역 농업과 함께 성장하기 시작했다.
‘필’, 전통주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다
수십 번의 실험과 수년간의 숙성 과정을 거쳐 강진희 대표가 얻은 결론은 분명했다. 좋은 술은 단순히 좋은 원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품종을 사용할 것인지, 어떤 효모를 선택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발효하고 증류할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 숙성할 것인지까지 모든 과정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하나의 술이 탄생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브랜드가 바로 ‘필’ 시리즈다. 필 시리즈는 처음부터 40도 증류주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선보인 제품은 25도였다. 이후 증류와 숙성 방식을 달리하며 40도 제품이 탄생했고, 최근에는 오크통에서 다시 장기간 숙성한 제품까지 선보이며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 “모두 같은 고구마 증류주”이며 “도수와 숙성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개성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필40은 위스키 숙성에 사용하는 오크통에서 다시 숙성시키는 방식을 적용했다. 증류를 마친 술을 곧바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3~4년 동안 기본 숙성을 거친 뒤 다시 오크통에서 약 4년 가까이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생각보다 크다.
투명했던 술은 은은한 색을 띠기 시작하고, 거칠었던 알코올은 한층 부드러워진다. 고구마 특유의 향은 더욱 깊어지고, 긴 여운이 남는 증류주로 완성된다.
강 대표는 “국내에서는 오크 숙성 고구마 증류주를 처음 시도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원료도, 효모도 모두 국산
필40의 가장 큰 특징은 ‘국산’이라는 점이다. 사용하는 고구마는 여주에서 재배한 품종이고, 증류에 사용하는 효모 역시 국내에서 개발된 효모다. 효모는 증류주의 향과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맥주나 와인도 효모에 따라 향이 달라지듯 증류주 역시 효모가 술의 개성을 좌우한다.
강 대표는 “증류주에서는 효모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며 “필 시리즈에는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효모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20~30대 여성 소비자들이 40도를 더 많이 선택했다. 25도는 고구마 향이 조금 더 부드럽게 살아 있는 반면, 40도는 증류주의 깊은 풍미와 긴 여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증류식 소주는 도수가 높아질수록 맛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애호가들이 많습니다. 필40 역시 고도수이지만 부드럽고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최근 국내 주류시장에서 가장 큰 변화는 소비층이다. 한때 전통주는 중장년층의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강 대표는 매년 열리는 국내외 주류박람회를 통해 그 변화를 직접 체감하고 있다.
“요즘은 전통주 부스가 가장 붐빕니다.”
와인과 위스키, 사케 등 세계 각국의 술이 함께 전시되는 박람회에서도 젊은 소비자들의 발길은 전통주로 향한다. 외국에서는 오히려 젊은 층이 자국 술을 잘 마시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전통주를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이는 젊은 소비자가 늘고 있다.
필 시리즈 수출
필 시리즈는 이미 해외 시장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가장 먼저 수출한 곳은 일본이다. 고구마 증류주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일본 시장에 우리나라 고구마 증류주를 수출한 것이다. 물론 아직은 대규모 물량은 아니다. 현재는 일본과 해외 고급 한식 레스토랑과 프리미엄 다이닝을 중심으로 조금씩 공급하고 있다.
고구마 증류주는 원료비와 숙성 기간 때문에 희석식 소주와 가격 경쟁을 하기 어렵다. 대신 품질과 스토리, 그리고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함께 전달하는 프리미엄 전략을 선택했다. 조금씩이라도 해외 소비자가 우리 술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필40의 라벨에도 여주의 상징이 담겨 있다. 세종대왕의 복색에서 착안한 디자인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또 하나의 이야기다. 술 한 병에도 지역의 정체성을 담으려는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다.
올해는 원료용 고구마도 직접 심었다
최근에는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원료용 고구마를 직접 시험 재배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농사를 지을 계획은 없었다. 복분자와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정도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원료용 고구마라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시험에 참여했다.
“술을 빚는 사람이라면 원료도 직접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 재배 결과가 좋으면 앞으로 필 시리즈에도 본격적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국산 원료를 이용한 증류주가 앞으로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15년 전 술을 좋아했던 한 사람의 호기심은 이제 여주를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이어졌다. 여주 고구마는 증류주가 되었고, 잊혀졌던 과하주는 다시 사람들의 술잔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술은 지금도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며 오크통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고 있다.
전통은 시대와 함께 숨 쉬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곳 양조장의 술이 오늘도 천천히 숙성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사는 팜앤마켓매거진 2026년 7월호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